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레이먼드 스프루언스 (문단 편집) == 상세 == [[태평양 전쟁]] 동안 일선에서 태평양 함대의 [[항공모함]] 부대를 지휘했던 [[제독]]들은 대개 전간기에 조종사 교육을 받고 해군 항공 특기로 빠졌던 소위 '개척자'들이었다. 하지만 스프루언스는 구축함, [[전함]] 함장을 거쳐 제독으로 승진한 이후에는 [[윌리엄 홀시]] 제독 휘하에서 [[소장(계급)|소장]] 계급을 달고 순양전대장을 맡았던 정통파 수상함대 사령관 출신이었다. 그런 스프루언스 제독이 태평양 함대의 핵심 인물로 대두된 시기가 바로 [[미드웨이 해전]]이었다. [[진주만 공습]]으로 전함 전력을 모조리 상실한 태평양 함대의 주력은 항공모함 위주로 편성된 [[태스크포스]]였고 이 부대를 총괄하던 인물이 바로 홀시 [[중장]]이었다. 하지만 우연히도 홀시 제독이 풍토병으로 입원을 하게 되는 바람에 전투 지휘가 불가능해지자 스프루언스가 홀시의 후임으로 엔터프라이즈 중심의 항공모함 부대 TF 16의 지휘관으로 임명됐다. 비록 항공 쪽 출신이 아니라는 약점이 있긴 했으나 오랜 기간 홀시의 휘하에서 순양전대장으로 근무했고, 기존 홀시의 참모진과도 손발을 맞춘 경력 덕분에 추천을 받은 것. 미드웨이 전투에서의 활약으로 당시 스프루언스 제독이 미군 부대를 지휘한 것으로 알려지기도 했는데, 사실 스프루언스는 TF 16을 지휘한 하위 제대의 지휘관이었다. 그러나 스프루언스가 지휘한 TF 16은 미드웨이 해전 당시 미 함대의 핵심 전력이었다. 실제 미드웨이에 투입된 미군 요격 부대는 스프루언스의 선임자였던 [[프랭크 플레처]] 제독이 지휘했다. 미드웨이 해전 중 플레처 제독은 일본군의 전력을 분산시키기 위해 스프루언스에게 휘하 부대를 분리시키도록 지시했고, 이후 요크타운이 피격당하여 전투 불능 상태에 빠지자 사실상 작전의 지휘권을 스프루언스 제독에게 넘겨줬다. 요크타운이 격침되어가고 엔터프라이즈와 호넷이 건재한 상황에서 플레처 제독은 아직 멀쩡한 두 항모의 지휘권을 가지고 있는 스프루언스가 남은 전투에서 보다 적임자임을 인정하고 사실상 모든 지휘권을 스프루언스에게 위임하는 훌륭한 행동을 취했다. 그래서 미드웨이 해전 후반부에는 사실상 스프루언스 제독이 미 함대를 지휘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미드웨이 전투가 끝난 후에는 [[체스터 니미츠]] 제독이 태평양 함대 [[참모장]]으로 지명하면서 잠시 함대 지휘에서 물러나기도 했다. 그리고 이 시기 종합적인 근무 평가를 통해 [[중장]]으로 승진했다. 하지만 니미츠 제독이 1943년 태평양 함대에 소속된 전투 부대를 총망라해 5함대를 편성하면서 초대 사령관으로 지명받아 다시 함대 지휘관으로 일선에 복귀했다. 이후 [[필리핀]] 상륙 작전 직전까지 [[일본]]함대를 상대로 굵직한 공적을 세우면서 [[대장(계급)|대장]]으로 승진했다. 그리고 [[필리핀 해 해전]]에서 일본 해군 항공대를 재기불능으로 만드는 엄청난 승전을 거둔다. 1944년부터 미 해군은 3함대 사령관 홀시 제독과 1년마다 교대로 함대를 지휘하는 독특한 정책을 세웠다. 함대 사령관과 참모진은 둘인데 함대는 하나였기 때문. 그래서 잠시 [[진주만]]으로 복귀하여 휴식을 취했고, 일본 본토 침공을 목전에 둔 상황에서 다시 함대 지휘를 맡았다. 이 시기 [[이오지마 전투|이오지마]]와 [[오키나와 전투|오키나와]] 상륙작전을 지휘했으며 전함 [[야마토]]를 격침시키는 실적을 올렸다. 종전 후에는 주일 미 해군 사령관으로 임명됐고, 1945년 9월 15일 와키야마에 도착하여 17일에 [[요코하마]]로 넘어가 본국으로 귀국하는 홀시를 환송했다. 11월에 제5함대 사령관 지위를 존 타워즈 중장에게 넘긴 스프루언스는 니미츠의 후임으로 태평양 함대 사령관으로 임명됐다. 12월에 홀시는 2차대전 참전 제독들 중 네 번째이자 현재까지 최후의 미 해군 원수가 되었지만 스프루언스는 홀시의 후원자였던 칼 빈슨 하원의원의 압력으로 원수 계급장을 달지 못했다. 대신 죽을 때까지 해군 대장의 급여를 온전히 지급받는 특례를 인정받았다.[* 구글링으로 알게된 내용엔 특례 대상자는 스프루언스 외에도 육군의 오마 브래들리와 공군의 칼 스파츠, 해병대의 알렉산더 밴디그리프트 장군, 해안 경비대의 러셀 웨쉐 제독으로 미국 의회에서 군종별 4성 장성 중 각 1명씩 선정해서 그들의 전시 대장 계급을 정규 계급으로 인정해주고 퇴역 후에도 현역 급여를 연금으로 받을 수 있게한 미국 의회 제80회 회기의 제791번 공법안에 근거한다. 다만 오마 브래들리는 이후에 원수 계급장을 받았다.] 두 달 후에 태평양 함대 사령관에서 물러난 스프루언스는 1946년 2월 1일부터 해군대학의 교장으로 재임하다 1948년 7월 1일에 퇴역했다. 그는 [[캘리포니아]] 주의 페블 비치에서 아내와 함께 은퇴 생활을 즐겼지만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의 지명으로 1952년 1월에 [[필리핀]] 대사로 임명되어 다시 공직에 복귀했다. 원래 1953년에 임기를 마쳤으나 다시 차기 대통령이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가 유임시켰기에 1955년까지 대사직을 수행했다. 이후 캘리포니아로 돌아와 다시 은퇴 생활을 즐기던 스프루언스는 1966년에 [[탈장]]과 [[백내장]]에 시달리다가 [[동맥경화]]증이 악화되었다. 1969년에는 장남 에드워드가 교통사고로 사망하자[* 아들또한 2차대전 당시 해군장교로 복무하였고 [[발라오급 잠수함]] USS Lionfish 함장으로 근무했었다. 적지않은 전공을 세워 은성무공훈장을 수여받기도 했다.] 정신적으로 이상을 느끼는 지적인지증까지 시달리던 스프루언스는 1969년 12월 13일, 자택에서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해군에 의해 장례가 진행되어 [[샌프란시스코]] 골든게이트 국립묘지에 니미츠, 터너, 록우드 제독의 묘 옆에 나란히 안장되었다.[* 태평양 전쟁을 같이 이끌어온 이 네명은 살아있을때 "죽어서는 서로의 옆에 묻히자"고 약속을 했었고, 이 약속이 이행된것이다. 니미츠 제독은 말할 것도 없이 [[태평양해역군]] 총사령관이었고, 나머지 세 제독은 니미츠 휘하의 태평양함대에서 각각 수상작전(스프루언스), 상륙작전(터너), 잠수함작전(록우드)을 대표하는 인물들이었다. 개인적인 친분도 두터운 사이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